인연의 소중함과 사랑의 아름다움
― 옥빈 시인의 시 세계 ―

리  헌  석
(시인, 문학평론가, 대전문인협회 회장)

1. 옥빈 시인 알아보기

..옥빈 시인은 90년대 말부터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
인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하여, 섬세한 서정이 아
로새겨진 시 창작을 보이는 시인이다. 신진 그룹에 속
하지만, 시 창작 연륜은 꽤 오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그는 대우조선에 근무하던 1986년에 [섬시] 창단
발기인으로 참여함으로써 문학에 발을 딛는다. 이어
경기도 용인으로 거처와 직장을 옮겨, 그 곳에서 [서
정3세대] 시 동인회를 창단 발기함으로써 중부권 문
학에 입성한다. 그러다가 1993년 문학잡지 {문학세계}
신인상을 수상하여 정식 등단과정을 밟는다.
..충청남도 계룡시에 머물면서 1997년에는 정우일과
함께 2인 시화전을 갖는데, 그림은 서상환씨가 맡아
호평을 받는다. 이어 2000년에는 김경문 시인과 2인
시화전을 또 갖게 되는데, 그림은 대전예총 회장을 역
임한 정명희씨가 맡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
다.
..그러던 중 사업장을 대전광역시 대덕구 대화공단으
로 옮기고 주거지도 대전 유성구로 이사하면서 완전
히 대전권 시인으로 자리잡는다. [서정3세대] 동인으
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한국문인협회 대전지회 회
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문학사랑협의회 회
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인터넷에 자작시를 연재
하기도 한다.
..옥빈 시인은 치열한 창작의식으로 작품을 빚은 결
과 2002년에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다. 제7회 한국생활
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문학사랑 제4회 인터넷문
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작품의 수준을 내외에서 높게
인정받는다.
..인정 받는 작품은 대부분 그의 실생활에 바탕한 작
품들이다. 그는 기계 생산과 관련된 공업인으로서의
모습도 작품으로 빚어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볼트와 너트
이 세상에 어찌 이처럼 아름다운
완성된 짝이 있으랴.

산과 골
그 깊지 않은 깊이로
흐르는 사랑.

세상의 모든 만남을 위하여 준비된
아름다운 힘은
사랑이다.
― [업무일지 3] 전문

..3연으로 된 단형의 이 작품은 옥빈 시인의 아름다운
서정이 녹아 있고, 또한 간결한 구성과 행간의 의미가 다
의성을 내포하고 있어 그가 지향(指向)하는 문학 세계를
담고 있다.
..1연은 기계와 철판을 다루는 직업인으로서 평소 대하
는 작은 사물을 관찰하고, 그 관찰한 대상에서 새로운 의
미를 찾는다. 너트와 볼트를 조립하면서 세상일이 이와
같이 조화롭게 완성되기를 소망한다. 이는 일상에서 지각
되는 사물과 현상에 대해 예민한 직관력이 문학으로 변
이되는 과정의 첫 단계라 하겠다.
..2연은 볼트와 너트를 조립하면서 산과 골짜기를 연상
한다. 두 개의 사물에서 그와 유사한 속성의 자연을 연상
하고, 그 자연 속에 흐르는 또 다른 속성을 탐색한다. 거
기에서 얻어진 것은 바로 '깊지 않은 깊이'로 흐르는 '사
랑'인 것이다. 이런 연유로 옥빈 시인은 사랑에 대한 여
리고 고운 형상화를 보인다.
..3연은 세상의 모든 사물은 만남에 의하여 의미망이 존
재한다는 것, 이런 만남이 합일(合一)의 경지에 이르러
'아름다운 힘'이 형성된다는 것, 이 힘이 바로 '사랑'임을
적시(摘示)한다.
..이와 같은 창작 의도가 옥빈 시인의 많은 작품에 드러
나고 있어 이 세 가지 커다란 흐름에 바탕하여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2. 직업의 아름다움 찾기

..옥빈 시인은 자신이 하는 일에 긍정적이고, 달관적 모
습을 보인다. 물론 직업으로 하는 일이 쉽고 재미있는 것
만은 아닐 터이고, 그 일을 통하여 기쁨이나 보람만을 얻
는 것도 아닐 것이다. 또한 직업으로 하는 일은 현실적으
로 고되고 땀내 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시
인은 그 힘듦 속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천착(穿鑿)한
다.

나는 직장인이다.
희망은 늘 다른 곳에 있고
철판이나 파이프의
자재비를 뽑으며
이것들을 절단하고 용접하는
우리의 뜨거운 불꽃이
어느 공장의
뼈대가 되고 혈관이 될 때
공사금액의 몇 분의 몇을
누가 떼어먹어도
우리의 일당은
해가 뜨고 지는 일이다.
용접 똥에 구멍난
작업복을 벗어 던질 때마다
우린 늘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근을 한다.
― [업무일지·1] 전문

..이 작품에는 시인의 내면이 약간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나는 직장인이다'에서 시인은 자신의 일에 대한 직업인
으로서의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직업인으로서 만
족할 수 없는 영혼의 빈 구석을 찾게 되고, 그래서 그는
'희망은 늘 다른 곳에 있'다고 실토한다. 그렇지만 직업인
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일에 몰두하며, <우리의 뜨거운 불
꽃이/ 어느 공장의/ 뼈대가 되고 혈관>이 된다는 것에서
보람을 찾는다.
..그러나, 일을 함에 있어 늘 긍정적인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사금액의 몇 분의 몇을/ 누가 떼어먹어도/ 우
리의 일당은/ 해가 뜨고 지는 일>에서 공사금액의 일부
를 편취하는 사람들의 실존을 밝히며, 그에 따라 손해를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해
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로 돌린다. 그렇게 함으
로써 일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긍정적 가치관으로의 변이가 쉽게 일어날 것
이다.
..시인은 <현장에서 돌아와/ 연장을 풀어놓을 때/ 용접
기나 산소는/ 우리의 든든한 믿음.>이라는 신념으로 작
업에 몰두한다. 하루의 작업을 마치고, 철사나 철근을 철
판에 붙이고 뗄 때 쓰는 작업도구인 '용접기' '산소통' 등
그 도구들에 대한 신뢰는 중요하다. 사물에 대한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다.
..이러한 마음은 바로 근로를 제공하던 지역에 대한 사
랑으로 승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곳에 올 때마다
고향을 찾는 기분으로
그리운 섬 하나 앞세우고 온다.

몇 해 동안 살았던 날들이
출렁이는 바다 위로 떠오르고
내 사랑의 추억의 술잔 위로 흐르는
남루한 내 삶

그리움도 사랑도 아무 것도 아닌데
때로 산다는 것이
눈물 같은 것이어서
잊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그리운 것은 더욱 그리워져
이곳에 와서 내가 낚아야 할 것은
내 사랑과 기억의 뿌리들이다.

이곳을 떠날 때마다
고향을 떠나는 마음으로
그리운 섬 하나 안고 간다.
― [거제도에서] 전문

..이 작품은 시인이 근무하던 대우조선이 소재한 거제도,
과거 추억 속의 노동현장을 찾아가는 길을 소재로 했다.
거제도를 찾아갈 때의 마음, 거제도에서의 단상, 돌아올
때의 마음 등을 작품으로 빚은 것이다. 노동을 제공하던
기업이 소재한 지역에 대한 추억과 사랑을 이렇게 노래
한 것은 특이한 형상화이다. 이는 시인의 내면이 바로 이
와 같이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것에 바탕하는 것으로 보
인다.
..이 작품은 아마도 옥빈 시인의 대표작으로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시인과 독자들
은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대할 수 있을 것이
다. 이 작품처럼 시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긍정적 시심으
로 작품을 빚는다. 이런 시심이 작품으로 승화할 때, 비
로소 아름다운 문학이 탄생하는 것이고, 그 작품 속에서
시인의 서정과 사상은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3. 연상의 놀라움 찾아보기

..옥빈 시인은 작은 사물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생성
한다. 남들이 지나쳐버릴 아주 사소한 사물에서 작은 이
치를 찾아내기도 하고, 인생의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때로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철학적 이데아를 생
성하기도 한다.

..기다림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곶감을 켜본 사람은 안다.

..앞마당 파르르 흩날리는 감잎 소리를 들으며
늦은 밤 아내와 곶감을 켠다. 처마 끝에 곶감 몇
개는 달려 있어야 가을이지. 당신이 남기고 간 가
을 풍경을 만들며 도란도란 가을빛 등불을 단다.

..찬바람 햇볕을 먹으며 작아지는 몸
..곶감을 손질해 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이 얼마나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 내는지를.
― [곶감을 켜며] 전문

..시인은 어느 늦가을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감나무에서
감을 딴다. 그 감의 껍질을 벗기고, 가는 줄에 꿰어 처마
밑에 매달아 말린다. 그 과정에서 시인은 기다림이 '아픔'
인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아름다운 빛깔'임
도 깨닫는다. <찬바람 햇볕을 먹으며 작아지는 몸>으로
서의 곶감을 보면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는다.
껍질을 깎아 끈에 꿰어 매달아 두면, 처음에는 주황색이
던 탱탱한 감이 조금씩 밝은 홍색을 띠며 줄어든다. 시인
은 이 과정에서의 해맑은 홍색이 되는 것을 시로 형상화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곶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일들이 이와 같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몸을 줄인다는 것은 겸손함과 더불어 자기 희생에 비견
되는 것인데, 이런 과정을 겪어야 아름다운 색깔로 거듭
난다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거나 희생하는 과정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고추 이야기]에서는 <모두가 푸르던 나의 사랑이 당
신 사랑에 붉게 물들고 내 몸 말라 쓰러져 가벼워진들
온몸 사르어 물든 당신 사랑 어찌 지우겠어요.>라고 반
문하는 과정에서 앞의 작품과 유사함을 노래한다. 내 몸
이 말라 가벼워진들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에
서부터, 또한 '붉게' 물들은 '당신 사랑'을 지우지 않겠다
는 다짐의 성격을 지닌다.
..이와 같은 작품처럼, 옥빈 시인의 작품에서는 작은 사
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 패턴인 듯
하다. [앵두꽃]에서는 <당신의 찬란했던 빛들이 사라지
는 동안 당신은 가슴 깊이 그처럼 탐스런 사랑을 묻어
놓고 푸른 잎 더욱 푸르게 희망의 덫을 놓았군요.>라고
노래하여 '슬픔' '희망' 등의 의미를 찾는다.
..[시래기를 엮으며]는 이런 작품의 본보기가 될 듯하다.
시인은 <시래기 엮어 헛간 처마>에 매다는 일과 인생을
유사하게 인식한다. 이것은 옥빈 시인이 보여주는 일반적
형상화와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3연으로 된 이
작품은 연마다 <그래, 삶이 뭐 별건가> 라는 방백(傍白)
으로 처리하여, 시작은 부정적이고 시니컬하다. 그러나
내용은 긍정적 시심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1연에서는 무청으로 엮어 만든 시래기일망정 <단 한번
은 그 무엇을 위해/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삶이
라고 정의한다. 2연에서는 <버릴 것 없이 살아가면 되지
>라는 전제 아래 <살아온 일들을 엮어/ 헛간 처마 끝에
매달아 놓>으면 된다는 인식으로 남들에게 남겨질 인상
에 의미를 부여한다. 3연에서는 시래기가 완성되는 것과
같이 <사랑이 찬바람 속에 숨어 있는 일>이라고 정의하
고, <단 한번 뜨거운 사랑>을 위해 목숨 다하는 것이라
고 본다. 이것은 시래기 자체를 노래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시래기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의미를 다른 삶과
연계한 것으로도 보여, 중의성을 활용한 특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러면서도 시래기에서 목숨 걸고 나눌 <단 한번 뜨거
운 사랑>을 찾아낸 시인의 지향은 바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로 보인다. 이런 작품도 감동을 생성하지만, 아름다
운 빛깔로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작품은 특별한 감동
의 메아리를 짓는다.

그대에 대한 내 언어들을
종이에 꼬옥 싸면
노을 빛깔 같은
사랑의 편지가 될까.
푸른색 잉크로 내 사랑의
모양과 빛깔을 그리면
그대의 훈훈한 입김으로 피어나는
그리움의 평화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 그대가
잔잔히 선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어스름 저녁
밤이 되어도 나의 사랑은
어두워지지 않겠습니다.
― [그대에게 4] 전문

..이 작품의 핵심은 말미에 있는 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다짐이다. <밤이 되어도 나의 사랑은/ 어두워지지
않겠습니다.>라고 노래한 다짐은 사랑의 확신에서 비롯
된다. 사랑의 확신을 위해 이 작품보다 앞서 창작된 몇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대에게 1]에서 시인은 <어둠이 오는 저녁 길에/ 그
대에게 내가 보여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대를 위
한 그리움보다/ 그대에 대한 그리움이/ 몇 배 더 소중했
음>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그대에게 2]에서는 <그대
사연의 뜨락에 남아 있던 눈물>을 질량과 비교하여 가치
를 평가하기도 한다. [그대에게 3]에서는 <눈부신 그대
모습도 다정한 목소리도/ 저 노을빛과 함께 저물 것만
같아서/ 그대를 그리워한 하늘가에/ 붉은 새 한 마리>를
그린다고 고백한다.
..이와 같이 옥빈 시인은 작은 사물에 삶의 양상과 위대
한 사랑을 수용한다. 이는 옥빈 시인이 다용하고 있는 연
상기법에 연유한 것이다.

4. 인연의 소중함 찾기

..옥빈 시인은 만남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일반적
속성이듯이 가까운 만남에서 특별한 의미를 작품으로 빚
는다. 그 중에서 '아버지'에 대한 인연은 다른 인연보다
더 현실성을 띤다.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를 나열
한 것이 아니고, 삶의 구체성에 바탕하기 때문에 새롭고
큰 울림으로 다가선다.

썰매를 폼나게 만들어 주셨던
토끼집도 튼튼하게 지어 주셨던
지게도 잘 만드셨고
바작도 꼼꼼히 엮어 장에 내다 파시던
미장공이었습니다.

천장도 잘 바르시던
물과 모래와 시멘트의 배합을 잘 하시던
술로 노동의 힘을 빌려 쓰셨던
반 목수였고 농사꾼이었습니다.

꽹과리와 장구를 잘 치셨던
큰 욕심도 없으셨던
남 주기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떠나고
농소리 2구 3반은 조용했습니다.
― [아버지는] 전문

..시인은 '썰매' '토끼집' '지게' '바작' 등을 잘 만드시던
아버지의 기능을 이어받은 것 같다. 그리고 '미장공' '목
수' '농사꾼'으로 생활 속에서 필요한 일에는 언제나 성실
했던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은 것 같다. 그러면서 '꽹과
리' '장구'를 잘 치시던 예인으로서의 기질도 이어받은 것
같으며, 남 주기를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박애 정신'까지
계승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작품 자체로서의 의미도 소중한 것이지만,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가 바로 아버지의 삶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자세이기도 하다.
..이런 자세는 [열무씨를 뿌리며]에도 드러난다. <봉지
에서 쏟아진 작은 씨앗들이 일제히 와― 하는 함성으로
제각기 흙 틈 사이로 자리를 잡는 동안 보일 듯 말 듯
씨앗들을 숨기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얼
굴과 숨겨지지 않는 얼굴을 이제는 뒷밭에 나와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산문 형태의 시 말미
에 시인의 내면이 오롯하게 들어 있다. 열무씨를 뿌리면
서 아버지를 연상하는 시인의 감수성은 놀라운 것이다.
[수세미 씨앗을 심으며]에서도 시인은 <여름 내내 무성
할 잎과 열매들은 다시 씨앗으로 돌아올 뿐, 울타리 가득
히 당신에 대한 그리움만 심어 놓았습니다.>라고 실토한
다.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추종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
로도 승화된다. [잡초를 뽑으며] 첫 머리에서 시인은 <
해마다 어머니는 도라지 밭에 잡초만 뽑고 계셨어요.>라
고 전제하고, 말미에서는 <들풀이 잡초가 될 때마다 하
루 내내 어머니는 도라지 밭에 심어져 우리들의 눈물을
만들고 계셨던 거예요.>라고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노
래하기도 한다.

사랑방 문지방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세상의 모든
티끌이나 먼지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날의 장마를
하염없이 바라본 적이 있는가

부엌문에 기대어
앞마당에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어머니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마주한 눈빛에 고개를 돌리시던
어머니의 슬픔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 [장마에 대한 추억] 전문

..이 작품 역시 계속하여 내리는 장마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
한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라고 반
복하여 '설의(設疑)'하는 것은 시인의 서정적 중심이 이
구절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1연은 서정적 자아가 사랑방 문지방에 앉아 내리는 비
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유로 독자들에게
'(그대들은) 이렇게 해 보았는가?'라고 설의(設疑)하는 것
이다. 2연도 마찬가지 형상화로, 세상의 모든 티끌과 먼
지들을 쓸어갈 장마에 대한 설의(設疑) 과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연상이 생성된다. 서정적 자아의 선험적
과정만이 아니고, 그 어머니의 입장에서 바라본 '비'와
'슬픔'을 장마비에서 연상한 것이다.
..[고추를 심으며]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복합적 이
미지를 합성한다. 그러다가 [우리집 풍경 1993 겨울]에서
는 <아버지는 군밤이나 은행 몇 알 구워 며느리에게 주
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시적 관심이 '부모'에서 '아
내'로 확대되는 시점이다. 그러다가 [우리집 풍경 1998
초가을]에서는 <네 살 아들 녀석 열심히 개나리꽃 같은
손으로 연신 꽃을 따다 들마루에 올려놓고 예쁘다 합니
다.>에서 시적 관심이 아들로까지 확대된다.
..이렇듯이 가족에 대한 시적 프리즘은 그의 작품에 특
별한 의미를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이미지가 바로 독
자들의 가슴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5. 옥빈 시인 다시 보기

..옥빈 시인은 삶의 희로애락을 작품으로 승화한다. 그
중에서 슬픔을 노래한 작품이 여럿이다. [슬픔을 위하여]
[다시 슬픔을 위하여] [또다시 슬픔을 위하여] [마지막
슬픔을 위하여] 등에서 시인은 '슬픔'의 여러 층위(層位)
를 새롭게 노래한다.
..그 기본이 되는 작품 [슬픔을 위하여]에서 시인은 <누
구나 조금씩은 울면서 산다./ 그래서 하늘은 노을이 진
다.>고 노래한다. 그래서 <피멍이 든 하늘을/ 사람들은
황혼이라 부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는 하늘 밑으로/ 붉
게 무너지는 우리들 사랑>을 절감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멍든 가슴풀이를 위하여/ 즐거운 합창 서너 곡
>을 예비해 둔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은 창작인의 예술가적 기질, 예컨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내면, 즉 불기(不羈)의 자유
혼에 대한 반증적 토로라 하겠다.

한 포기 들국화가 되어
하늘의 자유를 보며
그래, 우리는
들바람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유를 생각해야 해
밤을 지새도록
꼿꼿하게 서서도
아침을 위한 서곡을 준비해야 되지
아무렇게나 핀 게 아니야
들에 나와서
서로가 꿈꿀 수 있는
영토를 사랑했지
사람들은 그걸 몰라
한 포기 들국화가 되어
하늘의 자유를 보며
― [하늘의 자유를 보며]

..시인은 한 포기 들국화를 보면서도 하늘의 자유를 확
인한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자신의 영원한 지향점인 '하
늘'을 통해 입증한다. 그는 <서로가 꿈꿀 수 있는/ 영토
>를 소망한다. 그 영토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자 하
는 것, 이것이 바로 옥빈 시인의 시적 원형질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해 봄]에서 <한 역사를 빠져 나온
꽃봉오리/ 시대의 뜨락에 무수히 쏟아지는/ 이 푸른 자
유 앞에/ 찬란한 희망을 숨겨 놓았던 그대>를 찾는다.
그리하여 그대가 <아침 이슬을 털며 피어나는/ 꽃잎 사
이로/ 잠든 역사를 흔들어 깨우는/ 낮은 바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소망이 바로 옥빈 시인이 지향하는 창작 세계
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푸른 자유'를 찾기 위해 잠든 역
사를 깨우는 '낮은 바람'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지향과
시심에 박수를 보내며, 간략하게 맺는다.